<해당 인터뷰는 작품 오펀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펀스 대본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어땠는지.
초연을 못 봐서 내용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처음에 대본을 정말 꼼꼼히 봤어요. 그때만 해도 연출님이 ‘네가 트릿을 할지 필립을 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같이 생각해보고 작업해보자’라고 권유해주신 상태여서, 둘 중에 뭐가 더 나랑 맞을까 생각하면서 읽게 됐어요. 전 읽으면서 트릿에 더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트릿을 하게 된 게 더 좋았어요. 일단 오펀스 극 자체가 가진 메시지도 좋았지만, 제가 그동안 맡았던 캐릭터들은 여-남 배우의 역할이 확실히 정해져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그 경계가 흐려졌다고 해도 결국은 그 안에서 연기를 했던 거 같아요. 아무리의 <카포네 트릴로지>의 루시가 소위 ‘쎈 캐’라고 해도 딱 붙는 옷을 입고 나와서 여성임을 어필하는 것처럼. 그런 것들이 싫고 좋음을 떠나서 그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역할이잖아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재밌었고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극 중 후반부, 해롤드의 "이리 와, 딸아. 내가 어깨를 주물러 줄게. 괜찮아."라는 대사는 극 중에는 등장하지 않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하게 하는 것 같다. 트릿과 필립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수많은 상상을 하게 되는데 혹시 관객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유하 트릿의 전사가 있다면 무엇인지.
저희가 연출님과 상의하면서 함께 했던 얘기 중 하나는, 원래 대본에서는 남자였더라도 저희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여자예요. 저는 트릿이 엄마를 잃었던 때가 13살쯤이라고 생각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필립은 저한테 아기로 느껴지는 존재고, 안전한 집 안에 있어야 했겠죠. 하지만 엄마가 죽고 나서 시설과 제도권에 대한 압박이 있었겠죠. 트릿은 이에 저항하면서 가족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고아가 아닌 가족이라고. 트릿과 필립이 제도권이나 시설 안에 들어갔던 경험이 있었을 텐데 그럴 때 형이라는 호칭이 더 편했을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생물학적 여성으로서 밖에서 정말 험한 일을 많이 겪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공연할 때마다 가슴을 압박붕대를 감고 머리를 숏컷으로 하고 해요. 왜냐면 트릿은 여성성을 다 없애야 살기가 그나마 편했을 테니까요. 빈곤층에다가 여자라고 하면 이 세상에선 최약층이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라도 덜고 싶은 거죠. 연습때는 단발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는데 머리를 더 자르게 된 이유는 ‘트릿이라면 절대로 단발로 있을 리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최대한 남성과 비슷해져야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필립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의로 머리도 더 자르고 나타나고 공연 때는 가슴도 붕대로 감고 하겠다고 아이디어를 말씀드렸었는데, 연출님이 ‘네가 그렇게 하고 싶은 이유는 뭐야?’라고 물어보셨어요. 그 대답으로 내가 중∙고등학교 때 2차 성징이 시작됐을 때 가장 감추고 싶은 부위였으니까. 난 이게 드러났을 때 난생처음으로 시선 강간을 겪었으니까. 그나마 저는 부모의 보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잠깐 기분 더럽고 말면 됐지만 트릿은 당연히 훨씬 더 난처했을 거예요. 그러니 더 가리고, 남자인 척 다녔겠죠. 그리고 필립을 집 안에서만 있도록 싸고도는 것도 필립이 그런 시기라 더 마음이 조급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제가 당했던 모든 것들을 필립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엄마가 우리 딸이라고 불러준 건 너무 옛날 일이고, 사람들은 나를 남자로 취급한 지 꽤 됐고, 내가 ‘형’이었을 때 더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해롤드를 만난 거예요.
저희 입장에서 다른 페어들보다 조금 더 쉽게 관계성을 쌓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점은 해롤드 입장에서 트릿을 봤을 때 굉장히 동질감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바에서 마주쳤을 때 난 알아냈어.’라는 말을 저희는 좀 더 쉽게 풀 수 있었어요. ‘쟤도 그렇게 사는구나. 내가 걸었던 길들을 얘도 걸으려고 하는구나.’라고 바로 알아봤을 거 같아요. 해롤드는 한 번도 ‘여자라서 힘들지?’라고 하지 않고 트릿에게 수트를 사주고 임무를 줘서 트레이닝을 하려고 한단 말이예요. 그렇게 오직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다가 딸이라고 불러줬을 때 굉장히 놀라요. 오래전 내 곁을 떠난 우리 엄마 말고는 그 누구도 날 딸로 부른 적 없고, 여성으로 인지해주지 않았으니까요. 그 순간 생각하지 못한 해롤드라는 사람이 딸이라고 해줘요. 그걸 듣는 순간 여성으로서 겪었던 험하고 더러웠던, 그래서 이를 더 악물어야 했던 지난 일들이 많이 생각나서 마음이 무너지는 거 같아요.
그리고 사실 젠더 프리라는 용어가 쉽게 말하면 슈가프리처럼 성별이 없다는 거잖아요. 금지가 아니라. 저는 이걸 젠더 프리로 받아들여주셨으면 하는데요. 시작할 땐 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마지막에 딸이라고 들었을 때 혼란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희가 하는 젠더프리를 인간 그 자체로 봐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저는 한 번도 남자를 연기하지 않았어요. 내가 트릿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연기했었던 것 같아요.
트릿은 폭력적인 인물이기에 불편하게 느껴지거나 트릿의 감정을 전달하는 부분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트릿이라는 캐릭터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알아요. 제가 그런 사람을 정말 싫어하거든요. 주변에 너무 많기도 하고요. 가스라이팅 하는 사람에 대해 너무 많이 봐와서 이런 캐릭터를 카피하고 연기하는 건 전혀 어려움이 없었어요. 다만 제가 신체적 표현 방법이 모자라서 그런지 연출님이나 주변에서는 오히려 더 많이 하라는 말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성별을 나누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남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나 UFC같은 격투기 종목을 많이 본단 말이예요. 그래서 직접 주먹을 써본 적은 없더라도 흉내를 내 거나 익히는 것들이 꽤 있어요. 근데 저는 그런 부분에 대해 데이터 베이스가 너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더 해야 어설프지 않겠더라구요. 트릿이라면 밖에서 더했어야만 살아남았을 테니까요. 덩치도 그렇고 위협적인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더 강하게 해야만 할 텐데 내가 왜 그러지 못할까 하는 자책이 조금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폭력적인 모습들이 관객분들에게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 점은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어요. 평소에 그런 행동들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너무 눈 여겨봐 왔기도 했구요. 제 대사 중에 ‘저 사람 굉장히 위험해. 다른 사람들 처럼 네가 밖에 나가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라고 말할 때 그 말을 후루룩 넘기지 않고 저는 필립한테 아주 확신의 눈빛을 보내거든요. ‘난 네 목하고 혀가 막 부풀어 오르고, 숨을 헐떡이는~’ 그 모습을 다시 재현해 주고 싶어 해요. 가스라이팅의 전형적인 수법이 늘 그렇기 때문에요. 멍이 두 개라면 다섯 개가 난 것처럼 말하고 내가 정말 그랬었나? 하고 나를 물 들이는 것들. 저 역시도 어렸을 때부터 끝없는 가스라이팅을 너무 많이 당하기도 했어요. “넌 여자가 왜 그러냐” 이런 말이요. 이런 모습들에서 많이 따왔어요.
트릿이 필립과 함께 하는 시간 중에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 있다면.
저희 ‘나의 하루’ 씬이요. 저는 무슨 씬에 저 혼자만의 이름을 붙이거든요. “버스씬” 이렇게 모두가 그렇게 부르는 이름도 있지만, 제가 “나의 하루씬” 너무 안 외워져. 하면 수진 배우가 그게 뭐야? 하는데 나 집에 와서 나의 하루 설명하는 씬 있잖아~ 이런 식으로. (웃음) 그 ‘나의 하루’ 씬이 즐거워요. 팀마다 다를 수 있지만 저희끼리는 마요네즈 통을 2번 치면 시작이예요. 나는 바깥 세상이 이렇다는 걸 묘사해주면서 놀이를 통해서 또 가스라이팅을 하기도하고. 그리고 필립의 하루를 듣는 시간도 즐겁고요. 필립이 묘사를 되게 잘하고 흡수가 빠른 아이기 떄문에 보는 게 귀엽고 즐거워요.
트릿은 필립이 자신의 바운더리를 벗어나는 걸 굉장히 두려워하는 인물인데, 그런데도 필립은 자꾸만 그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한다. 트릿을 가장 두렵게 만드는 필립의 행동은?
준비 없이 밖에 나가는 거요. 준비라는 건 머리도 잘라야 하고 여자처럼 보이면 안 된다는 걸 말해요. 왜냐면 여자라는 것을 보였을 때 너무 많은 일이 생기니까요. 트릿이 당했었던 일들. 지도를 뺏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너 나가면 마음에 상처가 너무 많이 생길 거야, 나처럼.’ 하고 경고를 하죠. 이걸 아직 준비시키지도 않았고 준비시킬 생각도 없어요. 극단적이지만 늘 생각하는 게 있어요. 남자가 너를 만질까 봐 두려워. 이런 마음들이요. 저는 트릿이 헤롤드의 손길을 거부하는 건 남의 터치를 불쾌해한다기보단 터치가 있을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경계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생각해요. 필립이 의외로 저보다 강하거나, 지혜롭게 피할 수도 있지만 트릿이 그 생각은 못 해요. 트릿이 가장 고민하는 시기가 지금 무대에 보여지는 그 시기라고 생각해요.
이런 불안함을 보완하기 위해 영원히 돌봐주고 싶은 생각이 너무 커요. 그렇지만 사람이 강아지나 연인한테든 잘해주는 것들이 사실은 다 본인을 위해서 하는 행동들일 수 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너한테 잘해줘 왔어. 라는 말이 필립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 이유가 트릿이 자기만족으로 했던 행동이라서 그런 것도 있어요.
반은 걔를 위해서 반은 나를 위해서. 트릿은 아주 안 좋은 기억이 이 집에 남아 있기 때문에 혼자 있는 집이 너무 공포스럽거든요. 트릿이 혼자 집에 남겨지는 씬에서야 그 감정을 처음으로 알게 돼요. 그전에는 필립이 늘 같이 있어 줬기 때문에 몰랐던 거죠. 함께 해서 잊을 수 있고 같이 견뎌줄 수 있었고. 아마 무의식적으로 필립이 없으면 힘들어질 걸 알기 때문에 얘를 못 나가게 하는 거예요.
두 번째로 두려운 건, 필립이 알게 되는 거요. 나쁜 걸 알 까봐, 두렵고 너무 큰 세상을 알아버릴까 봐. 필립은 흡수가 빠르고 나보다 똑똑한 게 틀림없는데, 나보다 더 큰 세상으로 가버릴까 봐 그게 두렵죠. 사실 트릿은 다 알잖아요. 필립이 읽을 수 있는 것도 알고 나갔다 온다는 것도 안다고 생각해요. 알고 있는데도 아니야 라고 부정하는 마음으로 트릿도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문득 언젠가는 동생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
로퍼를 신은 순간이요. 그전에는 전혀 없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물려준 옷이나 엄마 옷을 입고 있었을 텐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거죠. 2막 초반까지만 해도 제 신발을 신고 있는데 로퍼를 갖고 나오는 순간부터 바로 ‘나를 떠나겠구나’ 까지는 아니어도 ‘나에게 큰일 나겠다’ 생각해요. 그래서 로퍼가 너무 싫고, 로퍼가 안 맞는다고 했을 때 당신은 얘 신발 사이즈도 몰라, 하며 기뻐해요. 하지만 곧 필립이 구둣주걱으로 로퍼를 신게 되면서 바로 한순간에 무너지잖아요. 그 순간이 가장 놀라는 순간 같아요. 필립이 나를 떠날 수도 있겠구나.
오펀스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롤드에게 격려를 받는 상상을 하게 될 것 같다. 배우 최유하가 해롤드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저는 이미 극 중에 받았어요. 해롤드가 트릿한테 칭찬을 정말 안 해요. 그래서 저희끼리 해롤드의 방식은 매우 잘못된 훈육방식을 하고 있다고 얘기하거든요. 강강 약약으로 하잖아요. 트릿에게는 해롤드 자신을 투영해서 자신이 훈련받은 방식을 그대로 주려고 해요. 심지어 트릿이 발작을 일으킬 때까지도 몰아붙이고 엄하게 다루지만 필립한테는 끝없는 칭찬을 준단 말이죠. 나에게도 맞는 칭찬, 임무 수행에 대한 인정을 해줬으면 했는데. 근데 마지막에 해롤드가 “넌 고개 돌릴 필요도 없이 너 할 일을 잘해왔어” 라는 말을 해주거든요. 저는 거기서 많이 격려를 받아요.
제가 연기할 때 극 자체의 끝이 우울하면 자기 전까지 그 여운을 길게 갖고 가는 편이라 멘탈이 힘든 극은 잘 못 하거든요. 예를 들어 <카포네 트릴로지> 에피소드 중 '루시퍼'는 비극이거든요. 그 극을 하면 너무 힘이 들었어요. 처음엔 오펀스가 그럴 줄 알았어요. 근데 안 그렇더라구요. 근데 그게 왜 안 그렇지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그 인정을 받고 어른 손을 잡고 따뜻해져 봐서 다 된 것 같아요.
가장 힘든 순간에 떠오르는 오펀스 대사가 있다면.
너무 많은데 대체로 해롤드의 대사구요. 부야베스 씬에서 필립에게 그 종들이 진화하고 수 천 년을 거쳐서 네 뱃속으로 들어가서 뭐가 되는지 알아? 라고 얘기해주는 거요. 그 각각의 종들이 너의 몸을 공격해서 너의 일부로 만들어 라고 얘기해주는 걸 정말 좋아해요. 성장에 대한 얘기잖아요. 위대한 역사를 지닌 종들이 내 입으로 들어와서 내 안을 공격해서 나를 크게 만드는 거죠. 그래서 그 대사를 너무 좋아하구요. 지도 씬에서 헤롤드가 우리는 은하계의, 지도의, 여기에 있다. 라고 말해줄 때 태양의 조각들. 굉장히 넓은 세상을 얘기 하잖아요. 근데 그게 나를 티클 같아 보이는 대사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 다른 대사처럼 나는 그만큼 큰 존재라고 얘기해주는 거 같아서 항상 너무 좋아요.
그 후 트릿의 삶은 어땠을지.
연습이나 초반에 생각할 때는 분명히 트릿이 비극을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필립은 성장했을거고 트릿은 그런 필립이 떠나도록 놔뒀을 거고. 트릿은 적어도 성인이 됐을 거기 때문에 이미 성장하기엔… 해롤드한테 행동만 봐도 배우려는 의지가 없는 상태잖아요. 뭘 배웠을 거 같지 않고 그 집에 그냥 나쁜 일을 하면서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잘 살았을 거 같다고 생각을 해요. 왜냐면 필립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필립도 나를 너무 사랑한다고 많이 느껴요. 그래서 나를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고 어딜 가도 편지를 해줄 거고. 나는 여행을 다닐거야 나는 다양한 곳을 방문할 거야. 라고 하잖아요. 거기에 날 데려갈 수도 있지도 않을까? 라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해요. 그래서 저는 해피엔딩이 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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